선장 보고받은 나폴레옹 “조선은 침략한번 안해본 국가라니”
18세기 들어 조선 바다에 이양선(異樣船) 출현이 잦아진다. 이양선이란 모양이 다른 배란 뜻으로 통상 서양배를 말한다. 이들은 해안 탐사와 수로 측량, 통상을 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을 찾았다.
◆조선인들, 시계 피아노 보고 놀라
1787년 한국 연해에 최초의 서양 선박으로 추정되는 배가 나타난다. 프랑스 군함인 부솔호가 제주도 해역을 측정하고 다시 남해안으로 돌아서 동해안으로 나와 울릉도를 발견하고 섬 이름을 다쥴레라고 명명한다. 1797년 영국 탐험선 프로비던스호는 영흥만에 입항했다가 동해안으로 빠져나가 부산 동래 용당포까지 접근해 조선 관원들의 조사를 받는다. 이 선박은 동아시아 일대의 해도를 작성하다 식량과 식수를 얻기 위해 조선에 왔다. 조선과 영국 최초 만남이었다. 이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1997년 ‘한영 만남 200주년 행사’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당시 부산에는 영국 최대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호 입항했으며 수천명의 인파가 몰렸다.
1816년 9월 영국 함선 알세스트(Alceste)호가 백령도에 상륙한다. 이 배는 해도(바다 지도) 작성을 목적으로 조선의 서해안 일대를 누빈다. 홀선장은 백령도를 자기 아버지 이름을 딴 제임스홀 군도라고 명명했다. 홀 일행은 주민들에게 영어 단어를 가르쳐 주며 접촉을 시도한다. 주민들과 교류하며 기호품과 조선의 토산품을 교환한다. 조선 주민은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후 홀 일행은 덕적군도와 격렬비열도를 거쳐 장항만에 정박한다. 고군산열도와 신안해협과 제주도를 지나면서 주민들을 만나 한국어 어휘를 수집하고 풍어제를 감상한다. 그는 돌아가면서 조선의 교류 과정을 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되어 있던 나폴레옹에 보고하기도 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이 세상에 남의 나라를 쳐들어 가보지 않은 민족도 있냐고 반문하고 내가 다시 천하를 통일한 다음 반드시 조선이라는 나라를 찾아보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홀의 조선서해탐사기’ 중 그들이 조선의 서해를 탐사하면서 그린 지도가 매우 정교해 오늘날 인공위성에서 촬영된 것과 거의 흡사하다고 한다.
1832년에는 동인도 회사 소속의 영국 상선인 앰허스트호가 황해도 장산곶과 충청도 고대도에 나타난다. 이들은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문서를 전달하고 통상을 정식으로 요구한다. 1840년에는 제주도 모슬포에 영국배가 들어와 주민들에게 총을 쏘는 사건이 일어난다. 1845년 6~7월 영국 군함 사마랑호가 제주도와 전라도 해안을 탐사한다. 군인들 제주도 우도에 상륙해 가축을 약탈하자 주민들은 놀라서 피난한다. 7월 6일 거문도에 도착해 측량하며 이 섬을 영국 해군성 차관의 이름을 따 ‘해밀턴항’이라 명명하기도 한다.
1846년에는 프랑스 군함들이 충청도 홍성에 나타나 천주교 박해에 항의하면서 “큰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협박하는 일도 있었다. 조선은 사대교린에 의해 서양과는 무역통상을 하지 않는다며 해답을 거부했다. 다음 해인 1847년 프랑스군은 회답을 받기 위해 당시 조선인으로 마카오에서 신부 수업을 받고 있던 최양업을 통역으로 대동하고 전라도 고군산열도에 나타난다.
1847년 세실 서한 회답 요구차 프랑스 군함 두척 전라도 앞바다 나타남. 암초 걸려 부안과 만경 경계인 신치도 섬에 정박. 주민들 때아닌 공포. 배에서 건져낸 대포와 총을 창고에 넣음. 창고에서 갑자기 시계 소리나 주민들 경악. “서양 귀신이 우리 섬을 해치기 위해 일부러 도깨비를 떨어놓고 갔다. 당장 굿판을 벌여 서양 도깨비를 몰아내자”며 굿을 하기도 했다. 때마침 시계소리가 멈춰 더 이상 일은 확대되지 않았다.
◆자기들 멋대로 섬에 이름 붙여
1849년 프랑TM 포경선인 리앙쿠르(Liancourt)호가 독도에 나타나 독도를 ‘리앙쿠르섬(Rocks)’이라 이름 붙인다. 1849년 영국은 그 동안 축적된 서양인들의 관찰 종합해 정확한 조선 지도를 발간한다. 훗날 거문도를 점령하기 위한 사전 준비인 셈이다.
1852년에는 미국 포경선이 동래 용당포에 정박했으며 1855년에는 포경선 어부 4명이 선장의 학대에 이기지 못해 강원도 통주에 머무른 적이 있다. 러시아는 1853년 군함2척이 동해안을 측량하며 영흥만으로 내려와 내양인 송상만을 발견하고 그곳을 라자레프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양선 출몰은 다반사가 되었다.
1854년 러시아 군함 팔라다호가 조선 탐사. 선실에 조선인 올라와 배를 구경한다. 주민들은 피아노 소리에 놀라 주민 나자빠지기도 했다.
1860년 중국에서 2차 아편전쟁으로 청황제인 함풍제가 열하 지방으로 피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서양인들이 곧 조선으로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져나갔으며 실제로 서울에서 지방으로 피신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18세기 중반들어서 한반도에는 시도때도 없이 이양선이 나타나 조선을 불편하게 했다. 헌종실록에는 “올해 여름과 가을 이래로 외국 선박이 경상 전라 황해 가원 함경 5도에 몰래 침입함에 쫓으려 해도 따라갈 수가 없다. 그 중에는 상륙하여 물을 길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고래를 잡아먹기도 하는 데 그 선박 수는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조선은 쇄국 정책으로 일관했으며 그 결과 통상 요구를 위해 조선을 찾은 서양 선박과 무력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1860년대 고종이 집권하고 대원군이 실제 정치를 펴면서 쇄국정책은 더욱 단단해진다. 결국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게 된다.
◆조선을 서양에 처음 알린 하멜표류기
하멜을 비롯한 네덜란드 선원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무역선 스페르베르(Sperwer) 호(號)를 타고 1653년(효종 4) 1월 네덜란드를 출발하여 같은 해 6월 바타비아(Batavia, 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7월 타이완[臺灣]에 이르고, 8월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로 항해 중 폭풍우를 만났다. 선원 64명 중 28명이 익사했다.
하멜을 포함한 36명은 제주도에 표착했다. 조선 관원들에게 체포돼 10개월간 제주도에 머무른후 1654년 5월 서울로 압송되어 훈련도감의 군인으로 배속됐다. 당시 조선은 외국인이나 낯선 인물이 나타나면 보내지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덨다. 하멜 일행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들은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 사신을 통해 탈출을 시도했다. 발각돼 전남 강진으로 유배된다. 강진에 흉년이 들자 전라도 여수 등 지방 여러 곳으로 분산 이송되었다. 전라도 여수로 이송된 하멜은 1666년 9월 동료 7명과 함께 해변에 있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탈출했다. 일본 나가사키로 도망하여 1668년 7월에 네덜란드로 귀국했다.
이들이 1653년부터 1666년까지 14년간 머무르면서 조선의 생활상을 적은 보고서가 바로 ‘하멜표류기’다. 조선의 지리 ·풍속 ·정치 ·군사 ·교육 ·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다. 하멜은 제주도에 표착하여 관원에게 체포된 경위와 1653년~1666년의 14년간을 제주도, 한양, 강진, 여수에 끌려다니며 겪은 고된 생활, 즉 군역(軍役) ·감금 ·태형(笞刑) ·유형 ·구걸의 풍상을 겪은 사실들을 소상하게 기록했다. 조선 사람과 접촉하면서 겪은 조선의 여러 지방마다 풍속과 사정을 상세하게 적었다. 부록인 《조선국기(朝鮮國記)》에는 한국의 지리 ·풍토 ·산물 ·경치 ·군사 ·법속(法俗) ·교육 ·무역 등에 대하여 실제로 저자의 보고 들은 바가 기록되어 있다.
하멜이 이 보고서를 작성한 이유는 14년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받지 못한 임금을 받기위한 것이었다. ‘하멜표류기’는 한국에서는 1917년 재미교포 잡지 ‘태평양’에 연재되었으며 최남선이 이를 ‘청춘’이라는 잡지에 최초로 수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