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교린(交隣)이었다. 말그대로 이웃과 교류하는 관계였다. 14세기말 한반도와 일본에서는 새로운 나라와 정권이 탄생한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일본에서는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가 남북조로 갈라진 나라를 통일한다. 1403년 두 나라는 중국과 조공관계를 맺고 체제 안정을 꾀한다.
조선과 일본은 교린 관계를 맺는다. 조선은 1404년부터 일본 국왕의 칭호를 쓰고 그해 10월 일본 사신을 ‘일본국왕사’로 칭한다. 쉽게 말해 일본 막부정부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조선은 중국과는 사대관계이며 일본과 오키나와(당시는 별도의 나라였음), 베트남 등과는 교린관계의 외교 정책을 폈다.
조선은 대부분의 일상적인 외교 정책은 대마도를 통해 진행했다. 당시만해도 조선은 일본을 한 수 아래로 여기고 있었으며 성가신 존재로 생각했던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 왜구로 여겼으며 조선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왜인들에 대해 단호한 조치와 회유를 거듭했다.
조선은 1407년 부산포와 내이포 2곳에 일본인들이 머무르는 것을 허락한다. 그러나 왜구 해적질이 계속되자 태종이 대마도 정벌에 나서고 국교를 단절하기까지 한다. 조선은 “백성을 왜구로부터 보호, 고아와 과부들의 눈물 마르지 않아 부득이한 일”이라고 했다. 대마도주는 사신을 보내 끊임없이 교역을 요청한다.
1426년 세종은 부산포(동래) 염포(울산) 내이포(진해)를 개항해 왜관을 설치해 왜인들이 머물게 한다. 그럼에도 왜구 문제는 두고두고 조선을 괴롭힌다.
1443년 조선과 대마도 사이에 계해조약(癸亥條約)이 맺어진다. 이는 조선이 대마도에 무역과 근해에 서의 어획을 허락하면서 후환을 염려하여 종전에 비하여 상당한 제한을 가하는 구체적 조약을 체결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삼포에 머무는 왜인수는 꾸준히 증가한다. 1490년대에는 3000명이 넘는다. 왜인들의 우두머리는 반드시 한양까지 와 임금에게 문안 인사를 해야했다. 부산이나 울산, 진해에서 출발한 이들은 내륙길은 보름정도, 수로는 20일정도 걸려 한양에 당도했다. 이들이 상경했던 육로가 나중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침략 통로로 이용됐다. 전쟁이 끝나자 조선은 왜인들의 상경을 엄격히 금했다. 상경한 왜인들은 규모에 따라 10일~30일간 한양의 동평관(왜인들의 전용숙고)에 머물며 임금을 알현했다. 임금은 이들에게 무역을 허락했고 연회를 베풀어줬다. 조선은 대마도주에게 일정한 자치권을 줬고 면세혜택까지 줬다.
조선과 왜인과 무역 교류는 활발했다. 조선의 품질이 좋은 면포와 비단, 인삼, 호랑이 가죽과 불경 등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국왕이나 영주들은 새로 절을 지으면서 조선의 불교 물품을 좋아했다. 특히 대장경을 비롯한 경전과 불화, 동종이 인기였다. 일본은 구리가 주요 상품이었다. 조선은 금속활자나 동전, 놋쇠 그릇을 주조하기 위해 구리가 많이 필요했다. 후춧가루와 화약 원료인 유황도 일본에서 들어왔다.
1500년대 들어 왜구의 난동이 극심해진다.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 이 일어난다. 그 해 4월 내이포에 거주하고 있던 옷과 칼로서 무장한 왜인 4000∼5000명이 성을 포위하여 민가를 불질렀다. 이 과정에서 부산포 첨사가 살해되고, 제포 첨사가 납치되었으며, 많은 백성들이 살해되었다. 조정에서는 즉시 황형(黃衡)을 좌도방어사(左道防禦使)로, 유담년(柳聃年)을 우도방어사로 삼아 삼포의 폭동을 진압하였다. 조선은 삼포에 거주하고 있던 모든 왜인들을 추방하였다.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다.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 일본은 대마도주를 통해 조선과의 외교 재개를 요청하였다.
1512년(중종 7) 조선은 대마도주 교류 호소에 입신조약 맺은 후 교역량 절반으로 줄인다. 15월과 윤5월 두 차례에 걸쳐 일본 국왕의 명을 받고 대마도주가 삼포왜란 때 난을 일으킨 주모자를 처형하여 바치고, 포로로 끌고 갔던 조선인을 송환하면서 화친을 청함에 따라 새로 임신약조(壬申約條)를 체결하고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이때의 임신약조로 내이포만을 개항하였고, 조선과 거래하는 선박 수와 인원 등을 조선 초기보다 더 강화하여 그 수를 제한했다.
1500년대 들어 일본 정국은 요동친다. 전국의 영주들이 힘자랑을 하는 전국 시대가 펼쳐진다. 1543년 포르투갈서 일본에 조총에 전해진다. 조총으로 무장한 오다 노부나가는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키고 최고 권력자로 부상한다. 그러나 1582년 일본 통일을 앞둔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에 의해 살해되고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1인자로 자리잡는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통일이 완성되면 조선에 출병할 것이라고 대마도 도주에 통보했다는 일본 기록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0년 각 지역에 난립하던 다이묘들을 진압, 일본을 통일한다. 이후 조선 침략 계획을 세운다. 일본은 1590년 일본에 간 조선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에게 ’명나라를 치러 갈 것이니 조선이 앞장서서 길을 비키라(정명가도, 征明假道)’는 국서를 전한다
정사 황윤길은 귀국 후 조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상을 이렇게 보고했다. ‘그는 눈이 예리하고 빛났으며 담력과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사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아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라고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나고야에 성을 쌓고 전국 영주들에게 병사 차출 명령을 내리며 조선 침략을 위한 준비에 나선다. 200년 평화가 깨진다.
미니)임진왜란전 조선 일본 90차례 사절 오고가
1404년 조선과 일본의 교린관계가 성립되자 조선국왕과 막부장군은 외교적인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각각 사절을 파견한다. 조선국왕이 막부장군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이 조선국왕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했다. 통신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信義)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의미이다. 초기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의 명칭은 보빙사(報聘使)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통신관(通信官) ·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했다. 통신사의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413년(태종 13) 박분(朴賁)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었지만, 중도에 정사가 병이 나서 중지되었다. 통신사의 파견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1429년(세종 11) 교토(京都)에 파견된 정사 박서생(朴瑞生)의 사절단이 최초다.
임진왜란전인 1590년까지 조선은 일본에 19차례 사절단을 보냈다. 이에 반해 조선에 온 일본사절은 무려 70회에 이른다. 조선사절단이 단순한 우호 교린이 목적인데 반해 일본은 경제적이거나 문화적인 목적도 있었기에 사절단이 많이 방문했다. 조선 정탐 등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연구도 있다. 일본사절단이 조선에 주로 온 목적은 팔만대장경 구경, 무역 확대, 명과의 관계 개선 부탁, 사찰 건립 비용 요청, 선박 운행횟수 증가 요청 등 구체적이었다.
조선 사절단은 주로 일본 국왕에 대한 축하나 일본사절단 방문에 대한 답례가 많았다. 단 1590년에는 일본이 조선을 침공한다는 얘기가 나돌아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 정국을 탐색하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