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시는 일본 메이지 유신을 탄생시킨 곳이다. 일본 근대사에 업적을 세운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쏟아졌다. 특히 조선을 유린한 인물들이 적지않다. 상당수가 군 출신들이다. 그렇기에 조선에 군사력을 보냈고 강제 병합 후에도 조선을 총과 칼로 무단 통치했다. 조선을 유린한 대표 인물 8명 중 절반 이상이 일본군 핵심이었다.
일본의 군인의 아버지 야마가타 아리토모, 명성황후 시해에 실질적 역할을 한 육군중장 미우라 고로는 대표적인 군인들이다. 이번 소개 인물 중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1849~1910) 외에 테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1852~1919),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 가쓰라 다로(桂太郞·1848~1913)가 모두 군 핵심 멤버였다.
◆무자비한 독재자 테라우치 마사다케
테라우치 마사다케는 3대 조선통감을 지내다 강제 합병이 되자 초대총독을 지냈다. 일본군인의 대부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심복으로 강제 병합을 마무리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성격이 난폭하고 무자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폭력으로 조선인을 다스렸다. 집회결사의 자유를 빼앗고 일제에 저항하는 세력에게는 가차없이 폭력을 휘둘러 무단정치를 단행했다. 1915년 조선총독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 기자는 조선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제 조선인은 곁눈질을 해서는 안된다. 곳곳에 경찰과 헌병이 깔렸으며 밀정은 사람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것과 같다’
그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헌병과 경찰을 일원화한다. 집회 결사의 자유가 금지되고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언론탄압과 교육 황민화 노골적으로 시행한다. 동국역사와 이순신전의 출판을 금했다. 문화재 10만점 이상이 일본으로 빠져 나갔다. 그의 시대에 조선 문화재 10만여점에 외국으로 반출됐다. 강화도와 개성에 있는 고려 고분, 평양의 고구려 유적, 경상도의 신라 고분 등이 파헤쳐졌다. 고려자기와 서화 책자 종 불상 등 수많은 문화재가 약탈당했다. ‘105인 사건’으로 테라우치 암살 미수라는 허위를 조작해 신민회원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는다.
그는 1852년 하기시에서 태어났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서 맹활약해 대장으로 승진한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통감일 때 헌병대장으로 조선에 온다. 첩보 활동에 뛰어난 능력이 인정받았다. 그는 임진왜란때 자신의 선조가 조선에서 죽었다며 이를 화풀이하듯 헌병과 경찰을 풀어 의병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조선인은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하라’고 했다. 1916년 총독에서 물러나 총리대신에 취임한다. 1919년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며 세상을 떠난다.
◆문화재 훔쳐간 소네 아라스케
야마구치현 출신의 소네 아라스케는 이토가 비명횡사하자 2대 조선 통감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토가 통감 시절에 1년 9개월 동안 부통감으로 있었으므로 실제로는 조선을 3년 가까이 다스린 셈이다.
소네는 이토 내각의 사법대신, 야마가타(山縣) 내각의 농상무대신, 가쓰라(桂) 내각의 재무대신을 역임한 다음 추밀고문관을 거쳐 조선통감부 부통감이 됐다. 이토가 죽자 통감직을 물려받았으나 이듬해인 1910년 병사하고 말았다.
소네는 석굴암의 대리석 5층 석탑을 훔쳤다. 조선의 고서는 물론 진귀한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갈취해 일본으로 보낸 상습범이었었다.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유신전쟁 때에 19세의 어린나이로 혁명군에 가담하였고, 군사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운 인연으로 프랑스 유학까지 하게 되었다. 소네는 조선 문화재 약탈에 자신의 권력을 이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불국사 석굴암의 발굴과 개축, 일본이의 반출 계획 등이었다.
소네 아라스케는 조선 통감 부임 한달만에 조선과 기유각서를 체결한다.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일본에 넘기게 된다. 그는 1910년 5월 조선통감직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해 9월 세상을 떠난다.
◆‘3.1운동 촉발’ 하세가와 요시미치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1905년 을사늑약 당시 조선주차군사령관이었다. 한성 시내와 경복궁 주변에서 무력 시위를 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2대 조선총독으로 무단정치를 펼쳐 3.1운동이 일어나게 했다.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 조선을 탄압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강직함과 직선적인 성격을 보고 조선주차군 사령관으로 추천했다고 했다.
1905년 테라우치 추천으로 조선주차군사령관이 된다. 부임하자마자 조선 의병의 씨를 말리겠다고 강력한 무력 진압을 선언한다. 그는 1908년 12월 조선주차군사령관직을 물러날 때까지 2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지원 받으면서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고 있던 의병 운동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1916년 테라우치 후임으로 조선총독이 된다. 전임자 테라우치의 무단통치를 계승했다. 의병 토벌과 문화 계몽운동을 탄압한다. 1918년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조선인의 땅을 상당수 빼앗는다. 1919년 3.1운동 일어나자 하세가와는 깜짝 놀라 육군과 헌병으로 시위를 저지, 진압하려 한다. 조선의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다. 총독부 통계 550여명 사망, 1만2000명 체포다. 박은식에 따르면 7500명 사망, 1만5800명 부상, 4만5300명 체포다. 1919년 8월 학살자란 이름을 가진 채 총독에서 물러난다. 1924년 사망한다.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1850년 이와쿠니 번의 무사인 하세가와 후지지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검술이 뛰어나 검술의 신동으로 알려졌다. 그는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 출전해 맹활약한다. 여단장으로 뤼순전에 큰 공을 세웠으며 청군 북양해군의 본거지인 웨이하이(威海衛) 공격전에도 참가해 함락시켰다. 청일 전쟁 때 세운 공을 인정받아 남작 작위를 받았다. 러일 전쟁 때도 일본군의 만주 진군에 일익을 담당한다. 육군대장으로 승진했다.
◆‘조선 식민지화 추진’ 가쓰라 다로
가쓰라 다로는 1910년 조선 강제 병합 당시 총리였다. 1901년 이노우에 가오루가 총리가 못되자 총리가 된다. 을사늑약에 앞서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는다. 당시 일본 국민은 세계 최강 영국과 동맹을 맺어 환호했다고 한다. 또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주도해 한일 강제합병의 국제 공인을 꾀했다. 가쓰라는 미국에 필리핀을 양보하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확실히 조선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영국과 러시아로부터 공식적으로 조선에 대한 보호권을 합법적으로 인정받았다. 을사늑약과 강제병합 당시 총리대신으로 조선의 식민지화를 총지휘했다. 아리토모의 직계로 육군 대장을 지냈다. 아리토모의 추천으로 육군차관, 육군대신이 되면서 승승장구한다. 야마가타의 오른팔이면서도 이토 히로부미에게도 친근하게 대한다. 세 차례 총리를 지냈으며 총리 재임기간이 무려 2886일로 상당히 길다.
미니) 조선 백합과 식물에 테라우치 마사타케 이름이 붙어
조선의 백합과 식물에 테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이름이 붙어있었다. 테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한자 표기를 따 사내초(寺內草)라 불렸다. 원래 백합과에 속하는 조선식물은 ‘조선화관’또는 ‘평양지모’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일강제병합 후 1911년 일본인 식물학자가 평양 부근에서 백합과 식물을 발견했다. 그는 1913년 ‘식물학잡지’에서 “조선의 땅은 일만사이에 끼어 있으나 아직 식물상 정밀한 조사가 없어 식물학상 유감이 적지 않아 이를 안타까워했으나 총독각하가 이 점에 착안한 것은 가장 감복하는 바이기에 본 식물을 각하께 바쳐 길이 각하의 공을 보존하여 전하고자 희망한다”고 적었다.
일본 식물학자는 총독이 자신에게 조선의 식물을 조사할 기회를 주어 새로운 식물을 발견했으니 그 은혜로 이름을 바친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각종 자료에는 평양지모의 학명에 테라우치라는 명칭이 남아있었다. 이후 나카이 다케노신이라는 학자는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식물조사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조선 전역을 누비며 식물을 조사했다. 그리고 조선 식물연구에 관한 최고의 명성을 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