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언제나 한국을 노린다. 400여년전 임진왜란 때도 그랬고, 150여년전 조선말기인 1860년대부터는 군사력과 정치력으로 조선을 유린하더니 마침내 조선을 빼앗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언제라도 틈이 생기고 한반도의 국제 질서가 무너질 때 일본은 언제라도 한국에 발을 들여놓을 것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일본에서는 본격적으로 조선을 취하려는 정한론(征韓論)이 본격적으로 불붙는다.
◆강력하게 대두된 한국 공략론(攻略論).
일본 근대 사상가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은 일찌감치 정한론을 주장한다. 그는 1954년 감옥에서 쓴 유수록(幽囚錄)에서 “서둘러 군비를 정비해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캄차카반도와 오오츠크해를 빼앗고 조선에게 조공을 바치게 하라”고 했다. ‘유수록’은 존왕사상에 입각한 동아시아 침략론의 개괄서다.
그는 1855년 조선을 취하고 만주를 거두려면 군함이 아니면 불가능하니 거함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력을 길러 손쉬운 조선 만주 중국을 취해 서양에 잃은 것을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1537~1598)를 조선 정벌을 감행한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조선과 직접 교섭하기 위해 외교문건을 보냈다. 조선은 문서 격식과 양식이 잘못됐다며 여러 차례 퇴짜를 놓는다. 이른바 서계(書契· 조선과 일본이 주고받던 외교문서)사건이다. 이전까지 조선과 일본은 수백년간 대마도를 통해 외교를 해왔다. 조선은 지금까지 잘 지내왔는데 갑자기 외교문서 형식이 종전과 달라지고 관리 명칭도 바뀌니 이럴 필요성이 있냐는 자세였다. 대원군의 쇄국정책도 한몫했다.
그러나 지방정부를 통일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되어가는 메이지 유신 정부는 종전과 달리 외교도 직접 챙기겠다는 자세였다. 자연히 조선과 일본의 마찰이 생겼다.
일본은 서계가 거부되고 조선의 반응이 그들 뜻대로 되지않자 여기저기서 정한론을 주장한다. 1869년 일본 외무관리 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小一)는 “왕정이 복고되어 천황 폐하로부터 직접 명령이 떨어지는 이상 조선을 과거와 마찬가지로 속국이 되어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게 해야 한다. 하루빨리 천황의 사절을 파견해 조선의 불순함을 꾸짖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1870년 외교관리인 사다 하쿠보(佐田白芽)는 은밀히 조선 정탐한 뒤 귀국, 조선의 군비 보잘 것 없으므로 정예병력 30개 대대만 동원하면 충분히 정벌 가능 주장한다.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센카(宣嘉)는 “조선은 지키는 것만 알고 쳐들어갈 줄을 모르는 나라이기에 10개 대대만 출병시키면 50일안에 조선 임금을 사로 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조선 무력행사 직전 좌절
일본 메이지유신 3걸중 한명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1828~1877)는 심복을 조선에 보내 정탐케 한다. 그 부하는 한복을 입고 조선을 정탐하고 돌아온 뒤 2~3개 대대면 조선 정벌이 충분하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마침내 1873년 메이지 정부에서 정한론이 본격 공론화되기에 이른다. 메이지정부의 핵심인물인 사아고 다카모리를 비롯해 이다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외무경(外務卿)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등이 정한론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들은 고위관리인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이 해외 시찰을 위해 외국에 나가 있는 사이에 사이고가 스스로 견한대사(遣韓大使)가 되어 외교적 타결을 시도하고, 여의치 않으면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여 무력 행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해외시찰을 하고 귀국한 이와쿠라 등 많은 각료들은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 국력을 키우고 내부를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해 정한론을 반대했다. 당시 신진 인물이었던 이토히로부미도 이때는 조선 정벌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정한론 논쟁이 계속됐다. 일본 최고 관료였던 이와쿠라는 한달여 시간을 끌다 정한론 반대를 결정하고 메이지왕의 허가를 얻었다. 이로서 정한론은 뒤로 미뤄졌다.
후유증은 컸다. 일본정계는 둘로 갈라지고 1877년 ‘서남(西南)전쟁’으로 이어진다. 정한론의 대표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마지막까지 사무라이혼을 불태우다 패해 자살한다. 당시 정한론를 미루던 인물들은 1875년 군사를 조선에 보내 강화도를 침공하여 강압적으로 강화도조약을 체결한다.
◆서계 사건이란? 외교문서에 황(皇)자 넣고 관직 호칭 바꿔
1868년 12월 일본은 사절단을 파견해 서계(書契·외교 문서)를 조선 측에 전달하려했다. 그러나 조선은 문서를 거부했다. 일본 사절 대표가 일방적으로 관직과 호칭을 바꾸었고,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일본 정부가 새로 만든 도장(圖章)을 사용하고, 중국 천자만이 쓸 수 있는 ‘황조(皇祚)’, ‘황상(皇上)’ 같은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이 거부 이유였다.
실제로 외교 주체의 변동 등은 외교 사절을 파견하기에 앞서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하는 사항이다. 따라서 조선의 반응은 국제 관례에 비추어 비상식적인 대응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일본은 외무성의 관원을 보내 근대적 조약을 맺을 것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일본 측 서계의 형식 및 용어가 구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조선이 일본 국서를 거절하자 일본사절단은 1872년 1월 3년 만에 일본 공관이 있던 부산 동래 왜관에서 철수한다. 일본 외무성은 같은 해 5월 말부터 1873년 2월까지 대마번에 대(對)조선 외교를 관할케 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왜관의 명칭을 ‘대일본국공관’으로 바꾼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된다. 1873년 일본에서는 정한론을 연기하는 관료들이 힘을 쓰고 조선에서는 쇄국정책을 펴던 대원군이 물러난다. 조선과 일본 실무진들의 접촉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