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론 주창 요시다 쇼인, 조선 정복자들을 가르치다.(시리즈 8)
정한론 주창 요시다 쇼인, 조선 정복자들을 가르치다.(시리즈 8)
  • 이두 기자
  • 승인 2017.08.2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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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에서 사설교육기관 운영... '서양에 빼앗긴 일본의 손해를 조선과 만주에서 벌충'

 

하기시 기념관에 있는 요시다 쇼인.

  메이지 유신 탄생지인 일본 하기시에 가면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스승 역할을 했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과 그 기념관을 만나게 된다. 이 곳에는 요시다쇼인이 일본 근대화를 이끈 인물들을 가르친 교실과 신사 등이 있다. 인근에 그의 생가와 묘지 등이 보존되어 있다. 요시다쇼인은 피끓는 젊은이들에게 존왕양이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불타는 역사의식을 심어줬다. 아베 일본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30세 나이에 압력에 굴하지 않고 산화함으로써 죽음을 초개같이 버렸다. 
 

탄생지에 세워진 요시다쇼인 동상. 앉아있는 인물은 친구다.

◆일본 근대화 인물들의 정신적 지주
 요시다 쇼인은 나라를 위해 뭔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당시 일본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강의로 유명했다.  ‘사나이는 일생 그 자체가 한편의 시가 되어야 한다…’ 고 가슴을 울려 젊은이들 자극했다. 그는 특히 제자들에게 행동을 강조했다.
 ‘시도 좋겠지만 서재에서 시를 짓는 것만으로는 뜻을 펼수가 없다. 사나이라 함은 자기의 일생을 한 편의 시로 이룩하는 것이 중요하다’
 감옥에 있는 그에게 제자가 “남자가 죽어야 할 때는 언제냐”고 묻는다. 그는 답한다.
 “세상에는 몸은 죽지만 혼이 살아있는 사람이 있고, 몸은 살아있지만 마음이 죽은 사람도 있다. 마음이 죽은 사람은 살아있어도 어떤 가치도 없다. 죽고 사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요시다쇼인은 1830년 하기성의 하급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기성하에서는 “마쓰모토(松下)촌에 천재가 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려서 홍역을 앓아 살짝 곰보였다고 한다. 10세때 번교 명륜관에 출강하고 11세때 번주앞에서 ‘무교전서(武敎全書)’란 병학서를 강의한다. 1849년 번의 명령으로 조슈번의 해안방어 실상을 조사한뒤 인재로서 인정을 받는다.
 1851년 에도로 6개월 유학하고 동북지방을 여행하며 안목을 넓혀 나간다. 1853년 전국 유람을 허가받고 에도로 간다. 그 때 일본을 찾은 미국배인 흑선을 보러 우라가만으로 갔지만 실패한다. 1854년 일본을 방문한 미국 군함인 페리함대의 미시시피호에 올라탄다. 미군에 의해 쫓겨난다.
 1857년 쇼인은 숙부와 이웃이 운영하던 개인교육기관인 송하촌숙(松下村塾)을 맡아 운영한다. 쇼인은 90여명의 제자들을 가르치며 막부토벌의 정당성을 전파한다. 그 제자들이 조선 강제 병합을 주도한 이토히로부미, 테라우치 마사타케, 기토다카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다카스키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등이다.
 1855년 그는 일본이 조선을 취하고 만주를 거두려면 군함이 아니면 불가능하니 거함이 완성될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정박중인 페리의 함선을 보고 ‘배도 대포도 적수가 안된다’고 친구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막부에게 서양의 군사술과 무기를 도입하고 인재를 외국에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쇼인이 활동한 기간은 1856년 8월부터 1858년 12월까지 2년 남짓이다. 정해진 시간표 없이 강론과 토론, 역사, 독서 등의 수업이 이뤄졌다. 송하촌숙 기둥에는 비이장목장(飛耳長目帳)이라는 공책이 걸려있다. 송하촌숙의 목조건물의 다다미방 3개로 이뤄졌다. 수강생들이 늘어나자 다다미 8개까지 방을 증축했다. 쇼인과 제자들이 직접 증축했다고 한다. 수강생이었던 이토히로부미도 증축 과정에 참여했다.
 쇼인은 1858년 양이파를 단속하는 막부에 대해 분노하며 대표젹인 마나베 암살 계획을 세운다. 조슈번은 쇼인의 행동을 중지하라고 하고 쇼인이 이를 듣지 않자 송하촌숙을 폐쇄한다. 막부는 쇼인을 소환하자 쇼인은 마나베 암살 계획을 순순히 실토한다. 재판소는 사죄(死罪) 판결을 내렸다. 1859년 10월 27일 외국밀항시도와 막부 비판을 이유로 처형된다. 그의 나이 불과 30세였다.
 기념관 인근에 쇼인의 삼촌이며 스승인 옥목문지진(玉木文之進)의 옛집이 있고 쇼인의 탄생지와 동상이 있다.
 요시다 쇼인은 구사카 겐즈이와 다카스기 신사쿠를 총애했다. 그때까지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그저그런 학생이었다.
 1907년 이토히로부미는 조선군대를 해산시키는 정미7조약을 맺어 조선의 숨통을 마지막으로 조인다. 이토는 쇼인의 무덤을 찾아 스승의 가르침을 실현했노라고 고한다. 그는 생전에 조선과 만주를 손에 넣으려면 함(艦)이 아니면 불가하다는 것이 나의 본뜻으로 이는 천하만세를 이어갈 업이라고 했다.
 쇼인은 제자들에게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을 가르쳤다. 천하는 천황이 다스리고 천황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는 논리다. 천황제의 논리를 제공했다.
 

요시다쇼인이 가르친 장소인 쇼카손주쿠에는 일본 근대화를 이끈 제자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요시다 쇼인 주로 남긴 말
-비이장목장(飛耳長目帳)-멀리 듣고 높이 보라
 송하촌숙 기둥에는 비이장목장(飛耳長目帳)이라는 공책이 걸려있다. 이 공책에는 쇼인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수집한 정보나 신문물이거나 오사카, 교토 등 대도시를 다녀오는 사람들을 만나고 들은 정보를 적었다. 쇼인은 이 공책을 통해 하기라는 변두리에서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제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사이후이(死而後已)
 요시다쇼인이 수감중 사규칠칙(士規七則)을 기록했다. 사무라이가 지녀야 할 일곱가지 덕목이다. 충효와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다. 핵심은 사이후이(死而後已)다. 생명이 있는 한 뜻을 그만두지 않는다는 것으로 뜻을 세우면 목숨을 걸라는 의미다. 박정희 전대통령도 육사시설 사규칠칙을 애독했다고 한다.
-초망굴기(草莽崛起)
 쇼인은 죽기전 제자들에게 유언으로 초망굴기(草莽崛起)론을 남겼다. “막부 및 제번의 무사들은 믿지마라. 신분에 관계없이 풀숲(草莽)과 같은 곳에 사는 민초를 일으켜 세워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 초야의 일반 백성들을 가르치고 깨우쳐 일어나야 막부체제가 뒤집어진다는 뜻이다.◆아베총리가 가장 존경
 아베신조 현 일본총리가 요시다쇼인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했다. 그만큼 지금까지도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뜻이다. ‘막부말기 지사의 스승으로 불린다. 타도막부의 정신적 스승 역할을 했다.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는 존왕양이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그는 서양 열강에 침탈당한 일본의 국익을 조선과 만주에서 벌충하자고 부르짖은 정한론의 원조다. 대동아공영론을 부르짖었다.  아베는 2006년 자민당 총재 출마의 변으로 “사무라이 된 자, 그 뜻을 세워야 그 뜻한바, 기 또한 좇는다”며 쇼인을 말을 인용할 정도다. 아베는 거의 매년 쇼인의 묘를 참배하며 각오를 다진다.
 쇼카손주쿠 앞에는 메이지유신태동지지(明治維新胎動之地)라는 기념비가 있다. 메이지유신을 100년을 맞아 당시 일본 사토총리가 친필로 세운 것이다. 아키히토 천황부처와 황태자 내외도 쇼인의 생가를 방문했다. 지금은 국가사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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