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을 수차례 방문한 이토히로부미… 중구청 옆엔 묵었던 여관(시리즈9)
인천을 수차례 방문한 이토히로부미… 중구청 옆엔 묵었던 여관(시리즈9)
  • 시니어오늘 기자
  • 승인 2017.08.29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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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공식적인 첫 방문해 사업가들에게 훈시...영친왕 데리고 인천통해 일본 가

 

이토히로부미는 인천을 통해 영친왕을 일본으로 볼모로 잡아가다시피했다. 이토히로부미와 영친왕.

 인천과 이토 히로부미
 대한민국에 ‘일제강점기 36년’의 씻을 수 없는 역사를 만든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메이지유신을 탄생시킨 하기시 출신이다. 그는 생전 여러 차례 인천을 방문했다. 1898년 조선 첫 공식 방문을 위해 한양으로 들어올 때 인천을 거쳤다. 1907년에는 일본 황태자 조선 방문을 맞이하기 위해 조선통감으로서 인천을 찾았다. 1907년 지방 순행차 수원을 지날 때 쯤 조선인으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공식적으로 조선을 22번 방문했다.

◆이토, 인천을 여러차례 방문하다.
 1907년 10월 16일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인천항에 도착했다. 조선을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일본 황태자는 조선을 강제병합하려는 일본 대신들의 요청에 의해 조선을 4박5일 방문하고 20일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1898년 8월 총리에서 물러난 이토는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인천을 거쳐 서울을 방문한다. 당시 인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인천부사(仁川府史)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토히로부미 후작이 인천에서 일장연설을 시도했다. 러일협상에 대해 공식적인 자리에서연설할 생각이었는 데 무역에 종사하는 관민의 초대를 받아 의견을 발표했다. 이토는 한양에서 누구도 받아보지 못할 정도로 환대를 받았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체결, 조선의 군사권을 빼앗는다. 이토는 3월 17일 특파대사로 인천에 도착한다. 조선 관리들의 환대를 받는다. 대한제국 대신인 민영환 등 10여명이 인천에서 그를 맞는다. 이토는 인천 부두에서 일본영사관까지 걸어서 간다. 거리에는 수백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영사관에서 휴식후 인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이토는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기 전까지는 일본에서 인천을 통해 한양으로 올라갔다. 경부선 개통 후에는 주로 관부연락선으로 부산으로 온 후 경부선을 타고 서울로 입성했다.
 1907년 12월 이토는 영친왕과 함께 인천에 온다.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다. 영친왕은 이토손에 이끌려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이토히로부미는 지금 인천중구청 돌담길 끝 부분인 아사오카 여관에서 머물렀다. 지금은 연립주택이 들어서있다. 사진은 인천 중구청 앞 일본인 건물들.

◆이토가 묵었던 인천 중구청 인근 여관.
인천 중구청 담벼락에는 근대를 상징물들이 많이 새겨져있다. 청일조계지 계단, 최초 등대, 호텔 등 근대를 보여주고 있다. 담벼락 끝에 4층짜리 연립주택이 있다. 이 자리에는 1897년 ‘아사오카(淺岡) 여관’이 있었다. 이 여관은 이토 히로부미가 인천을 거쳐 서울로 올라갈 당시 자주 묵었던 곳으로 알려졌다. 1905년 11월 이토가 고종을 협박해 을사늑약을 맺을 당시 이 여관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토는 여관에서 무엇을 생각했을 까. 고종과 조선을 대신을 어떻게 겁박해 효과적으로 늑약을 맺을 까, 조선을 뛰어넘어 만주까지 호령하는 꿈을 설계했을 까. 아사오카 여관은 일본식 건물이었다. 목조 4층으로 1~3층은 눈썹지붕을 설치했고 4층은 모두 합각지붕처럼 보이게 했다. 당시 최고급 여관이었다는 평가다. 아사오카여관은 광복 뒤 귀환동포 수용소로 사용되다 헐리고 지금은 다세대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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