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 탄생 하기시, 400년전 조선과 악연(시리즈 7)
메이지유신 탄생 하기시, 400년전 조선과 악연(시리즈 7)
  • 시니어오늘 기자
  • 승인 2017.08.04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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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인 모리가문 임진왜란때 최대 병력 파견…울산성 부산성 등서 전투

 

메이지유신 탄생지인 하기시 성주 모리 데루토모. 그는 임진왜란때 조선에 3만의 병력을 보냈다.

메이지유신 탄생지 하기시와 조선의 악연은 이미 400년전 시작됐다. 하기성의 성주인 모리가문은 임진왜란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군의 최대 병력이 된다. 3만명을 파병해 경상도 일대 진주성과 울산성 등에서 전투를 벌인다. 하기시는 수백년이 지나 메이지유신을 탄생시킬 인물을 배출시키고 이들은 다시 조선을 정복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아베총리가 하기시 출신 인물들을 존중하고 그들을 정신을 계승하자고 공개 석상에서 천명을 해 조선과 악연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하기성 모형. 지금은 성곽 흔적만 남아있다.

◆하기성주 임진왜란때 3만병력 이끌고 참전
 하기성주인 모리가문의 본래성은 히로시마였다. 성주는 모리 데루모토(毛利 輝元 1553년~1625년)다. 1591년 데루모토는 히로시마를 본거지로 성을 쌓았다. 히데요시로부터 112만석에 대한 영유권을 공인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에 협력해 조선에 3만병력을 이끌고 출동했다. 모리 군대는 조선 침략의 주력부대였다. 데루모토가 직접 군을 통솔하기 위해 조선으로 건너왔다. 정유재란 때 다시 조선에 오려했으나 병을 얻어 이키섬까지만 출전했다. 숙부인 히데모토는 정유재란때 조선에 와 울산성에 포진하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군과 합세해 조명연합군과 싸웠다. 1597년 데루모토는 도요토미 정권을 받치는 5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이 되었다.
 모리 데루모토는 임진왜란 초기때 경상도에 머물면서 일본에 편지를 보낸 내용이 방송에 소개된 적이 있다. 주요 내용은 ‘조선이 넓기는 일본보다 넓어 지금의 머릿수로는 이 나라를 다스리기에 모자라고, 게다가 말도 통하지 않으니, 여기저기 말도 통하고 조선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많이 필요한지라 실로 어려운 일이로다’ 이다.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유학자 강항은 ‘간양록’에서 데루모토를 이렇게 적고 있다.
 “조심성이 많고 느긋해 우리 조선 사람과 비슷하다. 동정심도 많다. 임진왜란때 일본인이 조선인의 코를 베어 바치면 ‘가엾은 일이다. 차마 어떻게 손을 댄단 말인가’라고 했다”

◆모리가문의 영욕
 1500년대 일본은 각 성의 영주들이 할거하던 전국시대였다. 점차 세력이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의 재편되고 있었다. 모리가는 150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인근 성주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그저그런 가문이었다. 그러다모리 모토나리의 아버지인 모리 다카모토(毛利 隆元 1523년~1563년)와 할아버진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1497년~1571년)가 주변의 성을 점령하면서 모리가문을 일으켜 세운다. 특히 모토나리는 모략과 전략의 천재로 불린다. 마침내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콜을 받거나 견제를 받으며 전투를 벌일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모리 데루모토는 1571년 할아버지 모토나리가 죽자 가문을 승계한다. 이 때 오다 노부나가의 기세가 전국을 호령한다. 데루모토는 노부나가에 반기를 들고 대항하다 패한다. 다행히 1582년 노부나가가 부하의 배신으로 자살하게 되는 혼노지의 변으로 살아남는다. 데루모토는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철저히 충성하는 전략을 취한다. 데루모토는 1591년 히로시마성으로 거처를 옮긴다. 임진왜란때 조선에 최대병력을 보내 충성심을 다시한번 보이고 마침내 히데요시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고다이로(五大老)의 하나가 된다. 임진왜란 당시 그는 주로 경상도 지역에 머물렀다. 지금의 부산왜성, 자성대 등이 남아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죽기 직전 아들 히데요리의 보좌를 데루모토에 부탁한다. 두 사람은 그만큼 가까웠다. 이후 모리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대립해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벌인다. 데루모토는 서군 총대장으로 오사카성에 입성한다. 전쟁은 도쿠가와의 승리로 끝났다. 모리가는 9개국의 영지 가운데 2개국, 36석만 남았다. 다행히 가문은 지켰다. 1603년 데루모토는 히로시마성을 대신할 근거지로 하기, 야마구치, 미타지리 3곳을 후보지로 정했다. 막부는 다시는 세력화가 힘든 변두리인 하기로 가라고 명령했다. 그는 1604년 하기에 터를 잡고 성을 지었다. 도쿠가와에 반기들 들다 패해 산간벽지로 쫓겨왔다. 이후 데루모토는 스님이 되었고 1625년 세상을 뜬다. 모리가문 260년 인고의 세월이 시작됐다. 이후 막부말기에 이르러 조슈번은 막부를 쫓아내는 근거지가 되었고 메이지유신을 이끄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마침내 도쿠가와 가문에 설욕했다.

하기시청 인근에 있는 '세개의 화살' 교훈.

◆모리가의 교훈 ‘세개의 화살’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1497년~1571년)가 형제간 결속 강조한 ‘세개의 화살’ 교훈 남기다. 하기성 성주인 모리 데루모토의 할아버지다. 모리 모토나리는 일개 지방의 군소영주에 불과했던 모리가문을 10개국을 다스리는 다이묘까지 키웠으며 막부에 버금가는 세력을 갖추게 했다. 그는 세명의 아들에게 ‘세개의 화살’ 교훈을 남겼다. 죽음이 다가오자 세 아들을 불렀다. 각각 하나의 화살을 부러뜨리게 했다. 바로 부러졌다. 세 개의 화살을 주고 한번에 부러뜨리라고 했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았다. 화살에 비유해 모토나리 형제의 결속을 강조한 이야기로 전해진다.

◆일본 프로축구팀 ‘ 산프레체 히로시마’
 일본 히로시마시를 연고지로 하는 일본리그 프로축구팀이다. ‘산프레체’는 일본어에서 숫자 3을 뜻하는 산과 화살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프레체의 합성어이다. 팀이름에 세 개의 화살 교훈이 담겨있고 상징물에 세 개의 화살이 그려져 있다. 모리가문은 하기로 쫓겨가기 전까지 본거지가 히로시마였다. 모리가문의 ‘세개의 화살’ 교훈이 반영된 이름과 상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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