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시에서 청소년을 보낸 이토 히로부미… 야망을 키우다(시리즈6)
하기시에서 청소년을 보낸 이토 히로부미… 야망을 키우다(시리즈6)
  • 이두 기자
  • 승인 2017.07.2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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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상승 기회얻어...쇼카손주쿠에서 이노우에, 야마가타 등 평생지기 만나

 

하기시에서 청소년을 보낸 이토히로부미. 쇼카손주쿠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이토히로부미.(맨왼쪽). 17~18세로 추정된다. 요시다쇼인역사관에 밀랍으로 만들어져 있다.

하기시는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가 9세부터 26세까지 지낸 곳이다. 1841년 야마구치현 아래쪽인 히카리시 벽촌의 미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다. 어릴적 이름은 하야시 도시스케(林利助)다. 머리가 좋다고 소문났다. 9세때 아버지를 따라 하기시로 이사온다. 아버지가 정부에 바쳐야 할 쌀을 몰래 슬쩍하다 걸려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이토히로부미는 13세때 아버지가 중간계급의 양자로 입적하자 최하위 무사로 신분이 상승한다. 이후 26세까지 청소년 시절을 하기에서 보낸다. 17세 무렵에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입학해 이 곳에서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평생지기들을 만난다. 그는 살인과 습격 등을 서슴지 않고 행하며 일본 근대화의 꿈을 키워나간다. 조선을 침략하고 아시아를 삼키려는 그의 사상과 가치관이 하기시에서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칼을 차고 있는 이토히로부미. 27세때로 추정된다.
하기시 이토가 살던 구옥의 표지석.

◆하기시에서 야망을 키우다
 이토는 1857년 17세때 사설교육기관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들어가게 돼 인생 행로가 바뀐다. 이토는 요시다 쇼카손주쿠에서 나라의 근대화에 목숨을 바치려는 급진적인 친구와 선배들을 만나게 된다. 메이지유신때 맹활약한 기도 다카하시, 다카스기 신사쿠 등과 함께 공부한다. 일본 군인의 아버지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여기서 만난다. 두 사람은 이후 40년간 각각 민간과 군에서 조슈번을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하며 협력과 경쟁 관계가 된다. 강화도조약의 부대표였으며 명성황후 시해에 간여한 이노우에 가오루를 이곳에서 만나 평생동지가 된다.
 그가 생활하던 집은 쇼카손주쿠와 300여미터 거리다. 스승 쇼인은 이토 히로부미가 훗날 주선가(周旋家)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토는 이후 교토와 나가사키 등을 방문하며 외국문물을 접한다. 1862년 영국공사관 방화에 참가하고 1863년에는 천황폐위 사례를 알아본다고 소문난 국학자를 살해한다. 1863년당대에만 무사 자격을 허락한다는 혜택을 입고 정식 무사가 된다. 신분상승이 확실히 이뤄진 것이다. 1863년 그는 조슈번 5인방(일명 조슈파이브)의 일원이 되어 영국으로 유학한다. 영국으로 떠나기 전 시 한수를 남긴다.

‘대장부의 뜻을 품고 나아가는 길에 주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후 교섭 능력을 인정받아 명치유신후인 1868년 효고현 지사가 되어 하기를 떠난다. 공부차관으로 승진한다. 1871년 유럽과 미국을 시찰하는 이와쿠라사절단에 부사로 참여한다. 귀국후 참의겸 장관이 되었다. 1873년 일본에서 정한론이 거세게 일자 이토는 일본의 발전이 시급하다며 천황이 직접 정한론 여부를 결정하도록 유도한다. 결국 정한론을 잠재우는 역량을 발휘하며 주선자로서의 재질을 보여준다. 이후 유신 3걸(사이고 다카모리는 패전후 자살, 오쿠보도시미치는 테러당해 찔려죽음, 기도다카요시 병사)이 사라지자 메이지시대의 중심인물로 부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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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히로부미의 일본 위인전 만화.

◆흙수저가 일본 초대 총리가 되다
  1880년대는 이토의 시대였다. 1882년 이토히로부미는 유럽 각국의 헌법을 알아보기 위해 유럽을 방문한다. 독일헌법을 참고하기로 하고 독일재상 비스마르크를 만나 도움을 청한다. 이는 독일이 프랑스와 전쟁에서 이겨 유럽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1885년 초대 총리대신이 된다. 44세였다. 신분조차 없었던 이토가 천황아래 2인자가 됨으로써 시대의 개벽을 몸소 알렸다. 일본 정계의 최고 인물이 된 것이다. 이후 명치 헌법 제정을 주도하고 4차례에 걸쳐 총7년6개월간 총리대신을 지낸다.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이 공포됐고 이토는 최고의 훈장을 받는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았고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한다.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암살당한다. 그를 소개하는 각종 팜플렛에는 암살당했다고만 간단히 적혀있다

◆20세기 4대 외교관으로 평가받다
 신흥국 일본의 국력이 욱일승천하자 서양에서는 이토히로부미의 정치력과 외교력을 높게 평가한다. 유럽에서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독일의 비스마르크, 청나라 리홍장과 함께 이토히로부미를 4대 인걸로 평가하기도 했다. 1901년 이토는 미국 예일대학 개교 200주년에 맞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에서는 훈장을 받았다.
 이토히로부미의 여성 편력은 유명하다. 그는 지방 출장시 맘에 드는 미녀를 고를 때면 항상 두 번째 미녀를 골랐다고 한다. 첫 번째 미녀는 지방장관의 애인이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피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방장관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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