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야마구치현 북부에 있는 하기시는 1850년대 서양의 개항 압력으로 일본이 어수선할 때 막부체제를 뒤집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천황체제를 부르짖으며 서구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메이지유신을 탄생시키고 일본을 근대국가로 만들어가는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해낸다. 시대의 선각자로 여기는 요시다쇼인을 비롯해 이토히로부미, 다카스키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기토 다카요시,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모두 하기시 출신이다. 이들은 국민평등 사상을 전파하고 서구 의회제도 도입과 국민개병제 의무교육제 폐도령 등을 시행한다. 이후 일본은 유럽과 비슷한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며 동양에서 유일하게 서양과 세력을 겨루는 강대국으로 자리잡는다.
◆260년간 칼을 간 하기시, 막부 무너뜨리다
하기시가 중심지역이었던 야마구치현(당시 조슈번)의 창시자는 모리가(毛利家)다. 임진왜란전 모리가는 오다 노부나가와 적이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손을 잡아 일본 서부 지역 최대의 다이묘로 자리잡는다. 임진왜란 당시 모리가의 창시자인 모리모토나리(毛利元就)의 손자인 모리데루모토는 3군의 대장으로 3만병력을 조선에 파견한다. 조슈번은 조선원정군 가운데 최대 병력이었다. 임진왜란 후 모리가는 정권은 잡은 도쿠가에이에야스에 밀려 하기시 일대로 쫓겨난다. 영지는 6개국에서 2개국으로 녹봉은 120만석으로 36만석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조슈번에서 벌어지는 신년인사회때는 번주와 가신사이에 매년 이같은 이야기가 오갔다고 한다.
“올해 막부를 치실 것입니까?” “아니, 금년에는 보류해 두지”. 그만큼 에도 막부에 대한 반감이 컸다는 사실이다.
에도막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이 모리가에게는 득이 됐다. 모리가는 조선, 중국과 밀무역을 하며 경제력을 키웠다. 자체로 사설교육기관인 메이린칸을 세워 인재를 양성했다.
◆메이지유신 태동지 하기시
메이지유신 태동지인 하기시는 지금 도시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도시라고 하기엔 농어촌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해안가에서는 곳곳에서 물고기와 멸치 등 어류를 말리고 낚시를 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아직도 교통은 편하지 않다. 오전에 후쿠오카나 시모노세키 등 대도시로 가는 기차를 놓치면 버스를 이용해야 할 정도다. 100여년전 지도로 아직도 하기시를 구경할 수 있을 만큼 지역에 큰 변화가 없었다.
임진왜란후 도쿠가와의 미움을 사 쫓겨가는 모리가는 야마구치에 새 거성을 지으려했으나 도쿠가와 막부가 이를 거절했다. 도쿠가와 진영은 모리가를 꼼짝 못하게 하기 위해 교통이 불편하고 병권을 도모하기 힘든 하기를 거성으로 삼으라고 명령했다. 이후 모리가문은 한반도와 가까운 지리적 조건을 활용해 틈틈이 밀무역을 했다. 조선과도 밀무역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200여년 넘게 나름대로 칼을 갈고 힘을 비축해 메이지유신을 앞두고는 독자적으로 거병을 할 수 있었다.
하기성은 1604년 모리테루모토(毛利輝元)가 36만석의 영주일 때 축성했다. 모두 허물어지고 지금은 돌담과 해자 일부가 남아있다.
◆1차세계대전 끝날 때까지 조슈 인맥 막강
일본은 1885년 의회제도를 도입한다. 의회제도를 만드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이토히로부미가 초대 총리가 된다. 1918년 1차세계 대전이 끝날때까지 일본 정치계는 메이지유신 중심세력인 하기시 중심의 조슈번과 사쓰마번 출신이 주도한다. 총리 18명중 16명이 메이지유신을 이끈 사쓰마, 조슈 출신이었다. 장관이나 차관급의 거의 절반이 이 지역 출신이었다. 1918년 남부번 출신인 19대 총리 하라 다카시(原敬)가 되어서야 조슈, 사쓰마의 번벌 정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라가 총리가 된 것은 메이지 유신의 원훈들이 고령으로 사망하거나 영향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야마구치현 출신인 아베신조가 총리가 되어 100여년만에 다시 메이지 유신들의 선조들을 불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