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조선을 유린한 일본 하기(萩)시를 가다(시리즈1)
100년전 조선을 유린한 일본 하기(萩)시를 가다(시리즈1)
  • 김현정 기자
  • 승인 2017.05.22 22: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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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 탄생지…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하세가와 등 조선 강제병합하고 통치

 

일본 하기시 출신으로 일본 근대화를 이끈 '조슈 5걸' . 이토 히로부미(뒷편 오른쪽)와 이노우에 가오루(앞줄 왼쪽)는 조선의 강제 개항과 강제 병합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부산을 마주하고 있는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기차로 북부 해안가를 따라 나가토시(長門)를 거쳐 3시간정도 가면 하기(萩)시가 나온다. 하기는 인구 5만명의 시골같은 소도시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으로 불릴 만큼 유적지가 많아 우리나라의 강화도와 분위기가 흡사하다. 하기시는 메이지(明治) 유신의 본거지다. 그러나 조선과 악연을 떼어놓을 수 없다. 100여년전 조선의 강제 병합을 주도한 일본의 핵심 인물들이 하기시 출신이다. 이전 청일전쟁과 임진왜란 때는 조선에 병력을 파견해 전쟁을 주도했다. 2018년은 메이지유신 150주년이다. 대한민국의 운명은 항상 4강대국(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틈바구니에서 바람앞의 등불이다. 현재 대한민국 상황은 미국 눈치보다 중국에 차이고 일본은 또 다시 숨어있던 전쟁의 발톱을 드러내 조선말과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일본 근대화 성공 이면에 조선의 아픈 역사가 숨겨져 있는 하기시를 방문했다. 역사가 보여주는 사실과 교훈을 시리즈로 엮는다.

하기시는 시모노세키에서 100키로미터 정도 거리다. 한국의 동해안을 여행하 듯 기차에서 보는 풍경이 빼어나다. 완행열차로 3시간 정도 걸린다.

◆하기시 출신 8인, 조선을 유린하다
  하기시는 일본 메이지 유신을 탄생시킨 곳이다. 일본의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일본을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주요 역할을 한 인물들이 많이 쏟아졌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을 집어삼키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 대다수다.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일본 근대화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여기서 태어나 제자들을 가르쳤다. '조선을 삼키라'는 씨앗을 뿌린 것이다. 한국 강제 병합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일본군 토대를 마련하고 '조선은 일본의 이익선'이라고 주장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강화도조약 당시 일본 부대표를 지냈으며 이후 명성황후 시해에 간여한 정치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조선 총독을 지내며 무단정치로 조선인을 두려움에 떨게한 데라우치 마시다케(寺內正毅)가 이곳 출신이다. 조선 공사로 부임한 후 명성황후 시해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을사늑약 당시 무력 시위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902년 일본과 영국 동맹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주도해 한일 강제합볍의 국제 공인을 꾀한 가쓰라 다로(桂太郞) 등도 하기시가 고향이다.

 

하기역은 시골의 소도시 역이다. 시골이어서 그런지 오전에 3차례, 오후 한 차례 정도 도시로 나가는 기차가 운행된다.

하기시 출신 인물들은 1905년~1919년 15년간을 조선통감과 조선총독을 지내며 조선을 지배했다. 8명중 2명을 제외한 6명이 육군 장성 출신으로 일본 군국주의 팽창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하기시 곳곳에는 이들의 탄생지와 출신지를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하기시민들은 이들이 조선에 얼마나 가혹하게 했는지는 모른 체 선조들의 업적만을 기리고 있다.  요시다 쇼인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으며 이토히로부미 옛집과 별저, 아리토모의 집 등이 유적으로 보존되어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이토 히로부미 별저에는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일대기와 활동상을 담은 사진 앨범이 보관되어 있다. 일대기를 보여주는 설명서에는 이토가 하얼빈에서 암살됐다 또는 한국인에게 암살당했다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취재기자가 일본 중학생들에게 한국 방탄소년단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학생들은 한국의 빅뱅을 잘안다고 했다.

◆임진왜란때 조슈번 번주 3만 병력 파견
 하기시와 조선의 악연은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 당시 조슈번의 번주는 모리가였다. 모리가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편이었다. 번주 모리 테루모토는 제3군의 대장으로 3만명의 병력을 조선에 파견했다. 모리 테루모토의 숙부 고바야카와 다카가게는 1593년 1월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이 이여송의 거느린 지원군을 대파했다. 모리가는 임진왜란 이후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핍박을 받게 된다. 일본사상 최대인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테루모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적인 서군의 총대장이 되어 격돌한다. 전쟁에서 패한후 모리가의 영지는 대폭 줄어들어 120만석에서 36만석으로 삭감된다. 하기시로 쫓겨난 모리가는 유신때까지 260년간 막부를 치기 위해 끊임없이 칼을 간다. 와신상담의 세월이었다.
 청일전쟁 당시에는 하기시 출신인 육군대장 오시마 요시마사는 병력 수천명을 이끌고 아산과 평양에서 청군과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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