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인천 제물포가 개항되고 그 이듬해 각국공동조계가 설정되면서 1888년 응봉산(鷹峰山) 일대에 러시아 측량기사 사바찐의 설계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Public Garden’이 조성됐다.
각국공원, 만국공원이라 불리던 이곳은 일제강점기 현 인천여상자리에 있었던 일본인 공원인 동공원과 대비해 서공원이라 불렸으며, 광복이 되면서 다시 만국공원으로 불리다가 6‧25전쟁을 겪고 난 1957년 개천절을 맞아 맥아더 장군 동상 제막식을 가지면서 자유공원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각국공원에 남아 있는 다양한 근대 문화의 잔상은 당시 건립됐던 건물과 시설들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주택인 독일계 세창양행 직원 숙소 건물, 당시 인천항에 입항하는 선박들의 랜드마크로 유명했던 영국인 사업가 존스톤의 여름 별장, 근대 기상관측을 시작했던 인천관측소, 천연의 스탠드를 활용했던 웃터골운동장, 1901년 신축된 각국인들의 사교클럽 제물포구락부 등은 당시를 증언하는 생생한 흔적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 회의’가 계획됐던 역사적 장소이다. 이 회의를 통해 홍진(洪震), 이규갑(李奎甲) 등 한성임시정부의 20명에 달하는 각계의 대표들이 4월 23일 만국공원에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려 했다. 각계의 대표가 다 모이지는 못했지만 한성임시정부의 수립과 관련해 일종의 ‘의회’의 역할을 한 중요한 회의로 평가되고 있다.
광복 이후 오세창의 발의로 해방 기념탑 건립을 준비하기도 했고(1945.10), 6‧25전쟁 후에 충혼탑을 제막했으며(1953.6), 인천출신 전몰장병 505위의 합동위령제를 개최(1953.11) 했던 공간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학도의용군기념비, 철도 및 세관용지 표지석들은 이러한 시대적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제물포 개항(1883)과 청일(1894)·러일전쟁(1904), 그리고 인천상륙작전(1950)에 이르기까지 인천 앞바다에서 일어났던 많은 역사적 사건과 그 부침(浮沈)을 함께 한 각국공원은 최초의 근대 공원이자 시공간을 초월한 근현대사의 타임캡슐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