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들어 수출이 예년보다 거의 20%가량 줄어들어 한국 경제 앞날을 한층 어둡게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수출에 목을 매는 나라다. 수출로 먹고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출덕에 지난 수십년간 국민들은 풍요를 누리게 됐고 한국은 세계10위권의 경제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경제가 수출의 날개를 달고 비상할 때 그 한가운데 5070세대가 있었다. 이른바 ‘수출역군’과 ‘산업역군’이다. 이들은 대학도 가지 못한채 전국 공단에서 밤을 지새며 일을 했다. 일요일도 쉬지 못했다. 하루 12시간 노동이 다반사였다.
5070세대의 땀과 함께한 또 하나의 친구가 있다. 바로 구로동 ‘수출의 다리’다. 전철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독산역방향으로 300여m거리에 있다. 1970년 12월 서울 구로동쪽과 경기 시흥쪽을 잇는 고가교로 만들어졌다. 이에 앞서 1967년 구로동 수출1단지, 1968년 2단지가 완공됐다. 1968년에 구로동 수출단지에서 박람회가 열렸다. 수출만이 먹고살 길이라는 사실을 대내외에 공표한 것이다.
1970년대는 박정희 정권 시절로 수출입국이 경제 최우선순위의 목표였다. 구로공단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물건이 이 다리를 통해 외국으로 수출됐다. 당시에는 나름대로 우뚝 섰던 고가교가 이제는 주변의 고층건물에 묻혀 그 위세(?)는 온데간데 없다. 1992년 4차선으로 확장 재개통됐다. 폭10m 길이330m다.
‘수출의 다리’가 관통하는 지역이 바로 옛 구로공단이다. 2000년에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명칭이 바뀌었다. 지금은 공단의 흔적을 찾아보기 쉽지않을 만큼 고층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군데군데 70년대 공단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다. 창고나 공장 형태의 건물이 대형건물 중간중간에 이빠진 듯이 머물러 있다. 지금 디지털단지안에는 IT기업과 대형 아울렛 의류매장, 대형 물류창고 등이 자리하고 있다.
구로공단은 5070세대의 삶과 추억이 머무는 곳이다. 1970년대 시골에서 무작경 상경한 10대 20대 청춘들은 이곳에서 가난을 벗어나겠다며 땀을 흘렸다. 소설가 신경숙도 한 때 구로공단에서 일했다. ‘외딴 방’은 그의 자전적 소설이다. 구로공단에서 일하며 야간고등학교를 다닌 시절을 적고 있다.
한국은 1964년 1억불 수출달성 기록을 세웠다. 불과 10여년이 지난 1977년 100억불, 1995년 1000억불 수출의 위업을 세우며 세계 속의 한국을 만들어나간다. 지난 2011년부터는 무역 1조달러 시대가 됐다. 수출액이 5000억불을 넘는다. 서울시는 2014년 ‘수출의 다리’를 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수출의 다리’ 모양은 일반 고가와 같지만 가치는 미래 후손들에게 알려줄만큼 남다르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