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시작된 한국 최초의 정미소 ‘담손이 방앗간’

2017-01-13     김현정 기자

개항 후 인천은 국내 최대의 미곡 집산지이면서 수출항으로 부상했다. 근대식 정미소가 생겨나기 이전 초기 수출단계에서는 벼를 가마채로 배에 실어 보냈으나 부피가 크고 무게가 무거워 경제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벼의 겉겨를 벗겨 현미 상태로 수출하는 매갈잇간이 생겨났고, 백미도정이 가능한 정미소가 생겨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인천 최초의 기계식 정미소는 1889년 일본인 신토오(進藤鹿之助)가 중앙동 4가에 연 인천정미소였지만, 설비와 품질에 있어서는 타운센드 상회에서 운영하던 타운센드 정미소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정미소다.

1892년 미국인 타운센드(W.D.Townsend)는 일본인 오쿠다(奧田直次郞)와 합작으로 한국 최초로 근대식 스팀 동력기를 도입한 정미소를 인천에 설립했다. 당시 사람들은 타운센드를 우리식으로 ‘담손이’라고 발음해 정미소 역시 ‘담손이 방앗간’이라고 불렀다.

담손이 방앗간에서는 1889년에 미국에서 발명된 최신식 스팀 동력 정미기 4대를 도입했다. 하루에 정미기 한 대당 쌀 16가마를 도정 할 수 있어 4대의 정미기로 64가마를 도정했다고 한다. 당시 담손이 방앗간의 도정량은 획기적이었다. 이 정미기를 통하면 모래와 돌이 섞이지 않는 것은 물론 미곡의 표면이 깨끗하고 광택이 나는 최상급의 백미로 도정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담손이 방앗간에서 도정된 쌀이 마치 수정처럼 뽀얗다고 해서 ‘수정미’라 불렀다. 그러나 도정된 쌀은 일본으로 수출돼 조선 사람들은 맛보기조차 힘들었다.

개항 이후 미곡의 집산지이자 최대 수출항이었던 인천항은 정미업이 번성했고, 타운센드는 미국에서 개발된 최신식 스팀 동력 정미기를 한국 최초로 도입해 정미업의 발달을 가속화시켰다. 이를 계기로 인천에 대형 정미소를 비롯해 소형 정미소가 여러 곳에 설립돼 운영되는 등 인천 공업에서 정미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했다.